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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 악의 평범성에 대하여

Junu_franco_moon 2019. 6. 21. 22:47

루치오 폰타나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홀로코스트를 다룰 때 피해자의 문제만큼이나 복잡한 것이 가해자의 문제이다. 일상적인 선과 악이 뒤집힌 사회에서 개인은 강요된 선택에 대한 책임이 있는지를 판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단지 범죄와 처벌의 문제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누군가 범죄를 저지른 것이 정신에 선천적인 결함으로 인한 것이라 할 때 사회와 법은 그에게 자비를 베푼다. 사건의 원인이 개인의 자유의지가 아니라 신체적 결함에 있으므로 처벌을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에 대한 일반적인 변호이다. 그러나 동일한 논리를 적용할 때, 머리에 총이 겨눠진 채로 다른 이를 총으로 쏘라 명령받는다면 그의 살인은 어떻게 다뤄야 할까. 생물학적 요인이 아닌 후천적이거나 사회적 요인에 의해 자유의지가 손상된 상황에서 개인에게 책임을 묻기 힘들어진다.

이에 대해 현대 심리학과 사회학은 구조 속에서 개인이 무력하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구조주의에 따르면 개체의 행동은 구조에 의해 결정되고 압제적인 구조의 폭력에 대항하기에 개인의 자유의지는 미약하다.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식은 폭력을 대물림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며 인간은 본래 백지고 개인의 악한 행동의 근본적인 원인을 사회 구조에 묻는다. 나치, 공산주의와 같은 전체주의의 압제 아래서 신념을 지키는 개인의 반항은 아름답지만 구조를 전복하기엔 미약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를 따를 때 개인의 행위에 대한 책임은 희석된다. 구조 아래서 개인의 자유의지를 보호하려는 논리가 결과적으로 개인의 역할을 축소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물어야만 한다. 거대한 구조 아래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왜 나치 체제에서 아이히만은 수많은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나 안톤 슈미트는 유대인을 돕다 죽기를 택했는가. 그들은 무엇이 달랐는가. 왜 “공포의 조건 하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따라가지만 어떤 사람은 따라가지 않는”[1]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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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점에서 아이히만의 재판과 그것을 지켜본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말한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의 전범으로 유대인을 유럽 각지에서 수용소로 이송하는 일을 맡은 책임자였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우연한 계기로 나치당에 가입하여 1932년 활동을 시작했다. 유대인 사회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처음에는 유대인들을 색출하고 게토에 분리 수용하는 일을 맡았다. 이후 최종해결책(유대인 대량학살 작전)이 진행되면서 그는 500만 명의 유대인을 수용소로 보내는 일을 맡았다. 그의 자랑은 정확한 시간에 출발하는 열차 시간표였을 정도로 자신의 일에 열심을 다했다. 독일의 패배 이후 아르헨티나에서 가명으로 살다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으로 압송됐고 재판 후에 1962년 6월 1일 교수형으로 죽음을 맞았다.

그는 재판에서 자신이 행한 일은 상부의 지시에 따른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자신은 한 번도 직접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거나 학살에 관여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폴란드 죽음의 수용소에서 학살되는 유대인을 보며 구토를 할 만큼 심약한 인물이었다. 그는 단지 사망률 99.99%의 수용소로 유대인을 적시에 열차로 이송하는 일을 맡았을 뿐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그는 근면했으나 생각을 하지 못하는 천박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러한 천박한 근면성이 5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지로 몰아넣은 후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던 원천이라고 지적하며 유명한 ‘악의 평범성’을 말한다. 이 일로 아렌트는 유대 사회에서 철저하게 배척받았으며 수많은 오해와 반향을 일으켰다.

악의 평범성은 누구나 상황만 주어지면 아이히만과 같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인간을 선천적으로 백지라고 가정하는 구조주의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실례였다. ‘우리는 모두 아이히만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것은 모든 악은 사회적 산물이라는 급진적인 생각을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심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개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이는 아이히만 자신의 변명에서도 다시금 확인되는 것 같았다. 그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언급하며 자신의 행동 근거는 보편 준칙인 국가의 명령에 따르는 데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그는 도덕적이고 선량한 사람이나 불운한 운명의 희생자가 된다. 그의 궤변을 따라 그가 무죄라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홀로코스트에서 목격된 악의 근원이 개인이 아니라 구조에 있다는 생각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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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나 아렌트는 구조주의적 해석이 자신이 의미한 바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가 전달하려고 한 것은 구조 속의 개인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반대로 개인이 자신의 선택에 대해 갖는 책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해석된 문장은 누구나 상황만 주어지면 아이히만처럼 ‘사회의 익명성 뒤에 숨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고 고쳐 써야 한다. 왜냐하면 평범banality의 의미는 모두에게 속한다general는 것이 아니라 익명성obscurity을 뜻하기 때문이다.

평범의 뜻은 어떤 특성으로 볼 때 하나의 집단에서 중간 정도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평균과는 다른 평범은 모호함을 내재하고 있다. 평범한 인간은 다수이다. 그리고 이 말은 사람에 관해 두 가지 방식으로 쓰인다. 우리는 표현하려는 대상에 대해 잘 모를 때 ‘그는 평범하다’고 말한다. ‘평범하다’는 말은 별로 관심이 없거나 언급하고 싶지 않은 대상을 묘사할 때 쓴다. 대상의 무개성은 실제 여부와 상관없이 화자의 무관심에서 시작한다. 평범은 대상을 무채색으로 그리고 아무도 아닌 사람nobody으로 만든다. 대상이 가진 특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뭉뚱그려 다수 속에 욱여넣는 것이다.

반면에 평범함이 외부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을 향할 때는 다르게 쓰인다. 보통 긍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되는데 ‘나도 평범한 -이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오해나 비난을 받을 때 평범이란 익명의 집단에 숨으려는 것이다. 이때 평범함이 지칭하는 것은 무개성이 아니라 정상적인, 옳다고 여겨지는 집단이다. 그리고 화자는 집단 속에서 자처하여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을 때 사람은 평범에 있고 싶어 하고 그렇게 아무도 아니게 된 사람은 집단의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평범은 대상에게 익명성을 부여하는 말이다.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말하며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이라는 수식을 붙였다. 아무도 아닌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다. 그는 집단에 속하지만, 그 자신이 누구인지는 절대 드러내지 않는다. 그가 자랑스레 여기는 집단 정체성은 완벽한 자기기만의 허상이다. 전체주의는 인간의 복수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시에 100명의 사람과 대화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입을 대신해 다른 이가 말한다. 전체주의는 선전과 구호의 외침이지 대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자신과 타인을 모두 비인간화하는 것은 나치 전체주의 정부의 핵심이었고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행정가들의 작용이었다. 행정가들은 모호하게 내려온 명령을 자신의 평상 업무처럼 당연하게 처리했다. 그 과정에는 어떠한 사유도, 판단도 없었다. 종이 위에 숫자가 옮겨갔고 도장이 찍힌다. 그곳에 사람의 얼굴은 없다. 수백만이 종이 뭉치로 대체된다. 행정가의 언어가 나치의 공식어였다. 아무도 유대인을 학살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단지 세분되고 전문화된 자신의 역할만을 계속하라는 명령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묵묵히 자기 일을 계속했고 유대인들은 침묵 속에서 죽어갔다. 그들은 대화할 수 없는 상대였다. 거대한 행정 시스템 속에서 개인은 익명의 톱니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자신은 익명이라는 허상을 믿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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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은 전체주의의 대화할 수 없는 특징을 설명한다. 이는 아이히만의 언어에서도 드러난다. 아이히만의 언어의 특징은 관습적인 표현과 완곡어법의 지나친 사용이다. 관습적인 표현을 통해 화자는 자신의 주관적인 체험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통용되는 정형화된 말을 한다. 장례식장에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관습적인 표현은 개인적인 체험을 드러내는 표현보다 안전하다. 왜냐하면 현실에 대해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시점(그것이 가장된 것이라 하더라도)에 화자의 자리를 두기 때문이다. 관용어로 인해 현실과 표현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호함은 평상시에는 문맥과 상황을 통해 포착되기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모호함을 해결해주는 문맥과 상황이 의미를 연결해주지 못한다면 관용어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전달하는 데 실패하게 된다. 예를 들어 공적인 영역에서 사용하는 행정 용어를 사적인 자리에서 쓰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오류가 발생하는 것은 표현이 대상을 직접적으로 지칭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치 정부는 언어규칙(Sparchregulun)이라는 의도된 관용표현으로 언어와 현실과의 괴리를 의도적으로 생성했다. <신질서(Neurodnung) → 넓은 유럽지역의 정복, 최후 해결책(Endlösung) → 유대인 학살, 재정착(Umsiedlung) → 유대인 이송>[2]처럼 언어로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을 때 그 상황과 현실을 일시적으로라도 모면할 수 있다. 언어규칙은 유대인 학살과 그것의 비인간적 면모를 살인을 집행하는 자들의 일상적 삶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나치 프로파간다에서 유도한 것은 살인을 정상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살인에서 쾌락을 얻는 자들을 철저히 배척했다. 대신 살인을 수행하는 이들의 영웅적 면모를 칭찬하면서 그들이 하는 일이 사적인 삶을 지키기 위한 업적이라고 포장했다.

아이히만은 이러한 관용표현에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언어로 현실을 설명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적당한 어휘가 없어서 겪는 ‘표현의 궁핍(Ausdrucksnot)’[3]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러한 은유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신을 전혀 내보이지 않는 상대와 대화하는 것은 불쾌한 경험이다. 관용 표현과 상투어로 점철된 대화는 혀를 굳게 한다. 현실을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생각할 필요 없이 주어진 말을 정해진 대로 하면 된다. 그렇게 현실을 외면하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이 갑작스레 현실을 마주하게 될 때 그는 공포에 질려 더듬거린다. 관용어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때 “섞여서는 안 될 영역들의 뒤섞임이 된다. 각기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뒤섞이게 되면, 혼란, 무질서, 더러움 위험, 불쾌감, 불안 등이 유발되어 삶을 위협하게 될 것은 분명하다.”[4]

그가 가진 언어에서의 무능력은 교수대에서 맞이한 죽음의 순간에도 드러났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 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5]그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현실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합의된 표현과 다른 이의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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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에게서 보이는 이러한 언어의 무능력은 사유의 무능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는 평범한 것이 아니다. 그는 칸트를 인용할 만큼의 교육을 받았고 자신의 행동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하지 않은 채 행동에 옮긴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에게서 아이히만을 발견하려는 구조주의적 주장은 틀렸다.

전체주의 시스템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악한 사회 구조를 작동하게 한 것은 악한 선택을 한 수많은 개인이었다. 사회 구조를 인간과 분리된 거대한 무엇이라고 가정하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 바로 그 개인이다.

아이히만과 안톤 슈미트의 차이를 배경, 정체성, 상황 등 외부에서 찾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 둘의 차이는 옳은 선택을 하려는 개인의 선한 의지의 측면에서 분석되어야 정당하다. 구조주의는 자신이 관찰한 사회에 들어맞는 보편적이고 적합한 하나의 이론을 원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이 아무리 인간을 자극과 반응의 기계로 가정하려 해도 인간의 행위는 완벽한 우연으로도 완벽한 인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이 개인적으로 악하거나 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이 구조에 상관없이 선천적으로 악할 수 있다는 가정은 인간이 자기 행위의 주인이 아니고 사회를 개선함으로써 인간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배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행위자가 자기 행위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자유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틀렸다. 그들이 원하는 완벽한 주권은 ‘완고한 자기 충족과 자기 지배의 이상(理想)’ [6]이기 때문이다. 전체주의가 모든 행위의 가능성을 차단하며 완벽한 자기기만에 이른다면 반대로 이들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가정을 위해 인간을 희생한다.              이에 대해 아렌트는 말한다. “자기 자신을 의존하거나 자신에 대한 완전한 믿음을 갖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력은 자유를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이다. 자신이 행한 것에 고유한 지배자로 남아 그 결과들을 인식하고 미래를 의지하는 것이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은 인간의 다원성, 실재성, 그리고 타인과 함께 세계에서 거주하는 기쁨을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이다.”[7]

사유라는 개인의 의무이자 권리를 강조하는 아렌트의 해석은 순진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의 설명은 아렌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는 인간의 언어 사용 방법처럼 인간은 유한한 선택지에서 무한하게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선한지 악한지 등의 문제 제기는 오늘날 잘못된 것으로 간주한다. 인간이 유연하게 행동하는 것은 미리 설계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 모든 사람이 선한 동기와 악한 동기를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그것을 똑같은 행동으로 전환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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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적 설명으로는 아이히만의 경우를 일반화할 수 없을뿐더러 비슷한 상황에서 다르게 반응한 안톤 슈미트 하사의 행동도 설명하지 못한다. 안톤 슈미트는 독일군 야전 부사관으로 순찰 임무 중에 만난 유대인 지하 요원들을 도와주고 처형됐다. 그는 위조 서류와 군 트럭을 제공하며 이 일을 5개월 동안 지속했으며 결정적으로 그는 돈을 위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가족들에게 “나는 그저 인간으로서 행동했고,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8]

이에 대해 비관적 결정론은 개인의 작은 선한 행위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보이지 않는 국기>에서 유대인 학살을 목격한 독일 외과 의사로서 페터 밤은 이렇게 말한다. “전체주의 국가는 그들의 적들을 침묵하는 익명성 속에서 사라지도록 한다. 조용히 이러한 범죄를 감내하기보다 감히 죽음을 감당하려 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려 했겠지만 쓸데없는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그러한 희생이 도덕적으로 무의미했을 거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쓸모없었으리라는 것뿐이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깊이 뿌리내린 확신을 갖고 있어서 보다 고차원적인 도덕적 의미를 위해 실질적으로 쓸모없는 희생을 감당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망각의 구멍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홀로코스트까지 들여다보지 않아도 518 민주화운동, 천안문 사태, 캄보디아 킬링필드 등 전체주의의 폭력성을 떠올릴 수 있는 사례는 세계에 넘친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건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는 살아남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우리에게 전해줬기 때문이다. 기억은 이어진다. 결정론자가 말한 ‘실질적으로 쓸모없는’ 희생은 없다. 그는 비겁하게 살아남기를 선택했고 다른 이는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기를 원했다. 아이히만의 것과 동일한 변명을 듣고 그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동조할 수는 없다. 그의 ‘입 속의 검은 잎’은 죽음만을 말하고 있었다. 그의 패배주의적 어조는 자신의 비겁함을 은폐하는 완곡어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옭아맨 구조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도덕적 반성이다. 자신이 방관한 학살의 피해자는 누구이며 자신은 누구인지 답할 의무가 그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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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가 도덕적 당위성에서 사유와 책임을 말하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인간의 세계에 살아가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다. 이를 위해 인간의 자유나 구조의 완벽함에 대한 강박을 버려야 한다. 지구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고 각기 다른 인간의 다양성에서 비롯되는 불일치와 미완결이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든다.  완결된 기억은 내부에 구멍을 갖듯이 완벽을 가장한 인간의 세계는 소외와 학살을 낳는다. 설령 선택이 나쁜 결과를 불러올 위험이 있더라도 기꺼이 행위를 하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는 자신의 오류에 대한 책임을 지는 용기이며 옳은 것만을 택하려는 노력보다 더 깊은 층위에 있다.

이러한 용기는 자신의 말을 자신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는 태도로 이어진다.  언어는 인간을 현실과 연결해준다. 자기 생각과 말로 현실을 마주하기를 포기하는 무사유는 다른 어떤 악의 조건만큼이나, 혹은 더, 최악의 결과를 부를 수 있다. 아이히만의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명확하다. ‘이 지구가 인간이 거주하기 적합한 장소로 남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자신의 말에 책임지는 태도이다.

 


[1]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p324

[2] 장기성, 관용어의 다의성, 언어과학연구 41, 언어과학회, p155

[3] Karl Bühler, Theory of Language: The Representational Function of Language, John Benjamins Publishing, p394

[4] 강병창, 안혁, 죽음의 수사학-완곡어법을 중심으로-, 수사학 18, 한국수사학회, p10

[5]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p349

[6]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한길사, p298

[7] 같은 책, p309

[8] 안톤 슈미트가 처형 전 그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https://www.yadvashem.org/righteous/stories/schmid/schmid-lette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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