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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와인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를 평가하기 위해 소믈리에라는 특별한 직업이 있을 정도니까. 베이브 와인은 이러한 풍조에 과감히 맞서 '쉽고 간편한 와인'을 내세운다. 캘리포니아의 햇볕 아래서 자란 포도로 만든 베이브 로제 와인은 파도바람처럼 신선하고 시원하다.

01. 코르크 따기의 어려움

와인은 그 시작부터 어렵다. 오프너로 와인의 꽉 막힌 코르크 마개를 따야 한다. 레스토랑에서 일하기도 하고 스페인에서 지내며 꽤 많은 와인을 따왔지만, 여전히 코르크 마개는 내게 부담스럽다. 오프너를 잘못 꼽으면 따다가 코르크 마개가 부러질 수도 있고 코르크 부스러기가 와인에 떨어질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어려운 것은 와인을 딸 때 사람들의 시선이다. 와인병을 잡고 코르크를 박아 넣을 때 느껴지는 시선은 노골적이다. '네가 얼마나 잘하나 보자'가 문자 그대로 느껴진다. 와인은 고급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래서 와인을 오픈하는 사람이 능숙하지 못하면 금방 비웃음이 따라온다. 고급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얼간이로 보이기 십상이다.

대체적으로 어려움은 존경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진다. 소수만이 이해하는 사실을 말할 때 그의 입술 끝에서 파르르 떨리는 의기양양함이 있다. 자신의 남자 친구가 변덕쟁이라고 말하지 않고 '발-러틀(volatileㅡ이 발음하기도 어려운 단어를 구글에 넣으면 volatile 읽는 법이 추천 검색어에 뜰 정도다)하다'고 말하는 어려움에 대한 동경이 있다.

02. 캔와인의 쉬움

베이브 와인은 쉽다. 브랜드의 캐치프레이즈인 'You Can Wine'에서도 드러나듯이 캔에 든 와인이기에 그냥 따서 마시면 된다. 격식 있는 자리와 로맨틱한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고급진 와인잔에 마시던 텀블러에 마시던 상관없을 정도의 쉬운 와인.

베이브 와인을 만든 Babe Walker는 와인에 대한 근거 없는 존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로제 와인을 좋아했고 운동하면서 텀블러에 마시고 싶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베이브 와인이다. 흔히 갖는 와인의 고급문화 이미지를 그녀는 공유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와인은 맛있는 음료이고 캔으로 된 와인은 더 편하게 와인을 마시는 방법일 뿐이다.

하지만 베이브 와인을 대하는 시선은 냉담하다. 병이 아닌 캔에 담긴 와인은 '그게 와인인가'라고 질문받는다. 애호가가 아닌 이상 용기로서 캔과 병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적다. 그럼에도 어렵고 특별해야 하는 와인이 캔에 담기는 것은 용납받지 힘들다.

쉬움은 정말 쉽게 경멸의 대상이 되고 만다. 베이브 와인은 '와인은 어려운 것'이란 편견에 쉬운 와인으로서 맞선다. 일부러 멍청한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다. 베이브 광고에서는 우스꽝스러운 차림의 남성이 와인을 쏟으면서 '와인은 여태껏 너무 지루했어'라고 말한다. 와인을 신성히 취급하는 유럽이었다면 뒤집어질 일이다. 

브랜드 창립자 Babe Walker는 와인 전문가와는 거리가 멀다. 뉴욕의 어느 한 백인 여성이 만든 캔와인이란 이유만으로 자칭 와인 애호가들은 눈살을 찌푸린다. 그녀는 사실 2013년 코헨 형제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의 인물이다. 그녀의 트위터 계정은 수많은 팔로워를 얻으며 유명해졌고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오른 'White Girl Problem'이란 책을 내기에 이른다.

그녀는 "나는 글루텐 프리, 비유제품, 저탄수화물, 저지방, 저칼로리, 무과당 그리고 유기농 제품 아니면 먹지 않아요"라고 당당히 말한다. 그녀에겐 알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발랄하고 잘 웃고 무례하고 고집이 세며, 격정적이고 충동적이고 밝고 짓궃다. 그녀는 자신의 세계를 신성시하는, 외향적이고 과감한 여자다. 멍청한 헛소리를 내내 지저귀다가도 어느 순간 무거운 오로라를 풍기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다. 그녀는 너무 자주 싫증을 낸다. 평소 대화에서는 듣는 둥 마는 둥 하지만 자신의 주제에서만큼은 집중해서 경청한다. 그녀는 거리와 낯선 사람을 두려워한다. 그녀를 잘 아는 지인은 말한다. "신나게 웃기면서 허풍을 떨다가도, 낯선 사람이 들어오면 자신의 세계로 냉큼 도망가버려요."

당신은 그녀를 정말 싫어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이 싫어질 것이다.
맞다. 분명 혼란스러운 일이다. _ Sophia Bush


그녀는 백인 금발 여성의 전형적 이미지로 나타난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그녀는 온갖 명품을 휘두르며 엉뚱한 일에 수많은 돈과 시간을 쏟는다. 그녀에게 사람들은 질투와 동경과 야유와 응원을 동시에 보낸다. 그녀의 사치와 낭비벽을 보고있으면 고개를 저으면서도 속에서 그녀를 향한 애정이 커지는 것을 느낀다. 베이브 와인은 Babe Walker가 과장된 몸짓으로 만든 와인이다. 이는 "나 좀 보세요"라고 소리친다. 거기엔 가식도 허영도 젠체하는 것도 없는 순수한 낭비와 사치가 있다.

Babe Walker는 베이브 와인을 통해 쉬움에 대한 경멸을 비꼰다. 와인의 어려움은 '와인은 응당 이래야 한다'며 마시는 사람까지 불편하게 만든다. 베이브 와인은 코르크 마개의 어려움에 대한 칭송을 뒤집는다. 어려움에 대한 동경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찬양이고 쉬움에 대한 비난은 쉬움에서 발견하는 자기혐오적 경멸일 뿐이다.

03. 참을 수 없는 캔와인의 가벼움

여름 장마가 끝나고 답답한 더위가 목을 조인다. 일과를 끝내고 베이브 로제 와인을 냉장고에서 꺼낸다. 베이브 와인은 혼자 편하게 마시기 쉬운 와인이다. 급히 책장 앞으로 가 어떤 책과 곁들일까 고민한다.

베이브 와인은 스파클링 와인이다. 목을 찌르는 청량감이야말로 이 와인을 찾는 이유다. 음료의 맛보다 톡톡 터지는 탄산이 더 강하게 혀에 남는다. 붉은 맛이 강한 레드 와인, 과일향이 깊게 배인 화이트 와인보다는 드라이한 맛으로 대표되는 로제 와인이 스파클링 와인으로서 가장 적합하다.

마시자마자 날아가는 가벼움이 베이브 로제 와인의 맛이다.책장 앞에서 이리저리 고민하던 손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앞에서 멈춘다. 프란츠는 '사랑과 섹스는 별개다'라고 말하며 가벼운 삶을 추구한다. 진실된 사랑을 추구하면서도 가벼움을 놓지 못하는 그는 Babe Walker와 닮아 있다. 밀란 쿤데라는 이 책에서 인간의 삶이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무거움은 인간에게 굴레를 씌우지만 의미를 준다. 반면 가벼움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만큼 무의미하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 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파르니메데스는 이렇게 답했다.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그의 말이 맞을까? 이것이 문제다. 오직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

_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p13

과거 인간의 의미를 붙잡던 전통, 결혼, 종교, 사상과 같은 무거움은 현대에 와서 희석됐다. 의무와 책임이 옅어진 현대에서 삶은 가볍다. 더 가벼울수록 더 자유로울 수 있으나, 그래서 더 무의미하다. 한없이 가벼워지는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이 있다. 인간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하거나, 또는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 부여해야 한다.

트위터 속의 인물인 Babe Walker에게 삶의 의미란 웃기는 아이러니다. 그녀에게 존재란 순간 날아가버리는 스파클링과 같기 때문이다. 무거움이란 단지 존재의 가벼움을 가리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하다. 그녀는 반쯤은 날아가버린 자신의 존재를 놓고 가벼움을 긍정하기 위하여 더 쉬워진다.

캔와인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모순을 담는다. 캔와인이 경멸스러운 이유는 한낱 포도 주스가 와인이라는 무거운 이름을 달고 나오는 게 하찮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어려운 말로 쓰인 라벨과 고급진 병을 제외하면 와인이 얼마나 가벼워질 수 있는 지 보여준다. 마치 온갖 허영을 제외하고 남은 인간이 사실은 이토록 가볍고 무의미하다는 사실처럼. Babe Walker는 베이브 와인을 통해 묻는다. 과연 네가 이 가벼움을 견딜 수 있겠느냐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두 잔 가량의 베이브 로 제 와인을 마시고 남은 캔은 한없이 가볍다. 탄산으로 인해 와인의 맛은 이미 입에서 흔적도 없이 날아가버렸다.

본 리뷰는 해당 제품을 무상으로 증정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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