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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같은 영화 - 찬실이는 복도 많지

Junu_franco_moon 2020. 11. 11. 22:49


나는 주인공이 행복하고 설레는 장면에 다다르면 노트북을 덮고 만다. 코로나로 영화관을 가지 못한지 오래됐다. 대신 네이버 시리즈나 유튜브,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곤 한다. 새로 산 맥북은-물론 중고지만- 화질도 사운드도 빵빵해서 영화 볼 맛이 난다. 엊그제 화면에 올라온 영화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다. 독립영화를 잘 보지는 않는데 친구가 추천해줘서 타임킬링용으로 틀어봤다. 영화는 흘러가고 주인공 찬실이는 도시락을 싸서 좋아하는 남자를 찾아간다. 화면은 따뜻하고 햇살을 따사로운데 나는 노트북을 덮었다. 주인공이 행복한 모습을 나는 견디기가 힘들다.


01. 찬실이는 영화 프로듀서다.


찬실이는 마흔 살 먹은 영화 프로듀서다. 예술 영화로 명성이 있는 감독과 오래 일했다. 남자친구도 사귀지 않고 좋아하는 영화에만 삶을 쏟았다. 그런데 새로운 영화를 들어가는 회식 자리에서 감독은 심장마비로 죽는다. 영화 촬영이 무마되고 찬실이는 언덕배기 셋방에 들어간다. 굽이진 언덕을 올라 올라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내다보이는 방이다.


돈이 없으니까 친한 여배우의 집에서 식모로 일한다. 그래도 찬실이는 꿋꿋하다. 방을 쓸고 닦고 된장국을 끓인다. 여배우의 집에 찾아온 코디네이터들의 비웃음 섞인 시선에도 굴하지 않는다. 오랜 만에 만난 제작사 대표에게는 '감독 없이는 넌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말을 듣는다. 화가 나서 씩씩대본다. 집주인 할머니에게서 '그래서 하는 일이 뭔데'라는 무시섞인 말도 듣는다. 그래도 찬실이는 괜찮다.


이때쯤 장국영이 등장한다. 흰 메리야스에 흰 빤스만 입고서 한국말을 하는 귀여운 장국영이다. 그는 찬실이에게 묻는다. "찬실씨가 진짜 원하는 게 뭐예요?" 요즘 찬실이는 김영이라는 남자에게 빠져있다. 프랑스어 강사로 일하는 그의 본업은 단편 영화 감독이다. 우연으로 인연으로 그와 가까워진 찬실이는 자꾸 그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장국영에게 묻는다. "요즘은 그냥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요." 찬실이는 도시락을 싸서 김영을 찾아간다. 갑작스레 전화를 받은 그였지만 같이 도시락도 나눠 먹고 커피도 마신다.


언제부터인가 행복을 행복으로 느끼는 게 힘들어졌다. 행복한 순간이면 꼭 찾아오는 우울과 추락이 무섭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원하는 대로, 또는 상상한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글이 잘 뽑힐 때다. 전에는 글이 잘 나오면 마냥 행복하고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고 그랬다. 지금은 조용히 담배 하나 문다. 내 자신에게 '수고했어'라고 말해주고서 다음 해야할 일들을 생각한다. 많이 기뻐하지 않으면, 많이 슬프지 않다. 그래서 나는 찬실이의 행복한 얼굴을 보며 무서웠다. 찬실이가 겪을 상처와 고통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삶은 영화가 아니니까. 영화는 행복해야 하는데 삶은 그렇지 않으니까. 찬실이는 행복하지 않을꺼니까.


02. 찬실이는 이 순간이 '영화 같다'고 말한다.


찬실이와 김영은 이자까야에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을 좋아한다는 김영의 말에 찬실이는 실망한다. "아.. 그런 영화 좋아하시는구나." 찬실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김영은 말한다. "그거 좀 지루하던데요." 찬실이는 억울해하며 영화에 담겨 있는 갈등과 그것을 얼마나 삶에 가깝게, 현실적으로 담아냈는지를 열변한다.


찬실이는 김영과 걸으며 어느새 다가온 겨울에 대해 말한다. 찬실이는 좋아하는 사람과 걷는 이 순간이, 밖은 춥지만 마음은 따뜻한 이 상황이 '영화 같다'고 말한다. 영화 같은 순간의 다음 장면은 추운 겨울에 나도 모르게 안긴 남자의 품에서 거절당하는 것이다. 찬실이의 사랑은 역시나 짝사랑이었다.


영화 같은 것은 극적인 순간이다. 한 순간의 봄으로 꽃이 피기도 하고 컷 하나에 겨울이 된다. 이런 저런 사건이 터지고 마음은 부풀고 헤진다. 그런데 찬실이에게 영화란 삶 같은 것이다. 영화 같은 것과 반대로 삶 같은 것은 조용하고, 애뜻하고, 잔잔하고, 애리다. 그래서 찬실이의 영화는 계속 된다. 영화 같은 순간들은 지나고 삶은 흐른다. 흰 눈이 쌓인 평야를 하염없이 지나는 기차처럼.


영화의 끝은 폭 안겨 위로 받을 수 있는 김영도, 말도 안되게 행복한 엔딩도 없다. 찬실이는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것의 답으로서 시나리오를 쓴다. 찬실이가 자신의 삶에 대한 답을 찾았는지는 미지수다. 그녀의 삶을 공허하게 만든 영화를 다시 붙잡는 것이 좋은 선택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찬실이의 영화는 끝났고 내게는 찬실이의 행복 또는 슬픔을 멈춰둘 방법이 없다.


영화는 멈출 수 있다. 행복한 순간만 보려면 노트북을 덮으면 된다. 삶에는 멈춤 버튼이 없다. 잠시 멈춰두고 다가오는 기쁨 또는 슬픔을 대비할 시간이 없다. 갑작스레 닥친다. 영화 같다. 그러나 존경하던 감독이 죽고, 직장을 잃고, 사랑을 잃는 영화 같은 순간들을 삶은 지나쳐 계속 흐른다. 예전에는 내 삶이 영화같기를 바랬는데 지금은 조금 덜 영화 같았으면 좋겠다. 그대신 조용한 것들, 손으로 밥을 먹여줄 때까지 가만히 있는 고양이라던가 또는 갑작스레 찾아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친구의 방문이라던가.



이 글은 김혜린님의 밥값 후원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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